어김없이 돌아온 메리크리스마스. 나이가 들어서 그런 지 이제 크리스마스여도 막 즐겁고 들뜨는 기분이 없다.
그저 합법적으로 집에서 먹고 놀 수 있는 주말1 느낌.
그래도 안 즐기면 섭섭하니까, 집에서 뭐라도 기분을 내봤다.
크리스마스 이브 날.

크리스마스 이브. 뭐 간단하게 집에 있던 먹태와 라면땅, 나초, 샤인머스캣, 멸치로 제로 맥주 마셨다. 나는 이 날 흉터 치료를 받아서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.
술을 못 마시게 된 것이 오히려 연말 폭식 방지의 중요한 역할을 해준 듯. 그게 아니었다면 나는 매일 저녁 병나발을 불고 있었을 것이다..

조용히 다가와서 먹태를 주시하던 꼬이 녀석. 스리슬쩍 코를 갖다 대기에 잽싸게 손 날로 위협을 했다. 대신 고양이용 황태채를 줬다. 인간이 먹는 먹태는 짜서 안된다.
근데 꼭 얘는 지꺼 안 먹고 우리꺼 탐내더라.
크리스마스 날.

침실에 있던 티비를 들고 나와서 세팅했다. 어색하게 지식채널e 가 나오고 있네.
식탁 위엔 감바스와 과일, 한우 스테이크와 미니 바게트, 매년 연말마다 코스트코에서 사오는 딸기프로마쥬타르트.


둘이 먹기엔 호화로운 한 상이다. 크리스마스가 아니면 이렇게 깔아 놓고 먹는 일이 없다. 둘이 살아도 의무적으로 연말 분위기는 내야 한다.
늙었을 때의 우리 부부를 위해.
나중에 나와 남편이 늙었을 때 돌이켜 볼 수 있는 추억이 많았으면 좋겠다. 그냥 우리 이렇게 살았었지. 하면서 늙어서 둘이 나눌 이야기가 많았으면 해서.

그러니 SNS에 꼭 올리지 않더라도 의무적으로 이런 사진은 찍어둔다. 과시용이라기 보다 늙은 우리 부부를 위해서. 쭈글하고 힘 빠진 노인의 내가 42살의 남편과 36살의 내 크리스마스를 돌이켜 보며 흐뭇하게 웃음 지을 수 있게.

비하인드 컷.
새 집으로 이사 오니 보일러가 얼마나 힘이 좋은 지, 조금만 틀어 놔도 집이 후끈하다. 니트는 사진 찍자마자 당장 벗어 던졌다. 그 사이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.
요리하고, 사진 찍었으니 숙제는 끝났다. 이제는 즐기기만.
영화 ‘채털리부인의 연인’을 보면서 먹었다. 정사 씬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. 숙련된 8년 차 부부에게 그 정도 자극은 식사에 1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. 남편은 폰 보고, 나는 연기 잘한다고 칭찬하면서 밥 먹었다. 이게 부부지.
크리스마스 다음 날

어제 먹었던 한우스테이크가 남아서 또 구워 먹었다. 나는 양송이와 파를 가득 넣어 토마토 파스타를 만들었고, 남편은 고기를 예술로 구웠다.
집에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평화롭게 지내는 연말 너무 좋다. 정말, 진짜로 좋다.
남편과의 정적이고 가끔은 지루한 이 평화가 얼마나 내게 소중한 건지 늘 상기하면서 오늘에 또 다시 감사한다.








