메타인지를 갖추면 늙지 않는다, 성숙할 뿐이다.
아, 글을 잘 쓰려고 하니까 도저히 시작이 안되네. 나는 맨날 이런 식으로 헛소리부터 하다가 글이 나오는 편인데 나 답지 않게 처음부터 정제된 글을 쓰려고 하니 계속 썼다 지웠다만 하게 된다.
심지어는 시작을 못하겠어서, 그냥 임시 저장을 해 놓고 튀어버릴까 생각했다.
임시 저장은 이 글감을 버리겠다는 것과 다름없거든. 왜냐면 이 주제의 글은 지금이라서 쓸 수 있는 거여서, 나중에 다시 이 주제로 글을 쓰려고 하면 생각이 안 나서 못쓴다.
자, 신기하게도 또 글을 막 써 내리니 글이 술술 풀린다. 내가 나의 습성을 파악하고 있는 것도 메타인지라면 메타인지겠지.
AI에 대한 글을 읽다가 ‘메타인지’라는 단어를 봤다. 메타인지는 내가 뭘 알고, 뭘 모르는지. 객관적 입장에서 스스로를 바라보고 타인에 공감하며,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인지능력이다.
나는 종종 내 스스로의 메타인지를 가늠해본다.
타인이 나에게 하는 발언에 대해 내가 꼬인 생각을 하게 될 때나,
남들은 다 알아듣는 것 같은데, 나만 못 알아 먹고 있는 것 같을 때,
내가 여전히 20대와 비슷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고 착각할 때,
메타적 관점에서 바라보면, 내가 해야 할 행동이 명확해진다. 내 안의 편협한 사고의 틀에 갇혀서 상대의 말을 재단하거나 멋대로 해석하려 들지 않으면 그게 정말로 나쁜 의도였더래도 여유 있게 받아칠 수 있고, 그렇지 않은 경우엔 성숙한 태도로 상대와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다.
“거 봐요, 내 말이 맞았잖아요.”
내가 싹 긁히는 말투다. 내 말이 맞지? 류.
메타인지가 발동하기 전의 나는 내 말이 맞지? 라고 으쓱대는 동료를 가만히 두지 못한다. 다른 말로 저 사람을 이기고 싶어지는 것이다. 그러나 메타인지가 발동하면 저런 말을 하는 동료보다는, 그런 말에 긁히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.
‘내가 몰랐고, 그래서 틀린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했지만. 사실 우긴 건 내가 맞으니까 가볍게 인정하고 넘어가자. 이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야’ 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.
메타인지.
같은 설명을 듣고 모두가 끄덕이고 있지만,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. 다른 사람들 따라 그저 끄덕이는 대신 용기 내어 물어보는 것.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을 수 있지만, 나는 이 내용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고,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물어보는 과정들.
메타인지.
팀장님이 애매한 말로 요청한 업무를 멋대로 해석하지 않고, 의도와 목적성을 파악 후 방향을 잡아나가는 것.
메타인지.
30대 후반의 내가 20대때처럼 비키니 입고 숏츠를 찍는 게, 타인에게는 결코 보고 싶지 않은 민망한 영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.
메타인지.
중년의 기로에 선 나는 일도, 관계에서도, 그리고 외모에 대해서도 메타인지를 발휘해야 할 필요성을 매우 많이 느끼고 산다.
메타인지를 계속해서 훈련하지 않으면 정말이지 대단히 우스운 노인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. 겉가죽은 찌글찌글해졌는데 반대로 뇌는 민둥민둥해진 늙은 내 모습을 상상해보라. 끔찍하다.
그리고 그 예시를 보여주는 인간들이 내 주변에 꽤 많기 때문에 살아있는 교육 자료가 되어주고 있기도 하다.
늙은 자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메타인지뿐이다. 육체적 노동도 어려운데, 메타인지마저 되지 않는 노인은 AI시대에 그저 쓸모없는 짐 그 이상, 그 이하도 아니게 될 것 같다.
나이가 드는 동안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AI가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구축해야 한다. 그것은 지식이나 노동과 같은 단순한 형태가 아닐 것이다.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하는 의미 있는 행동과 말의 형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.
다양한 경험으로 깊이 있어진 늙은이는 AI가 대체할 수 없는 감동을 줄 수 있을 테니까. 늙어서도 여전한 쓸모를 갖춘 사람에게는 그저 늙은이라 표현하기 민망하다. 그런 이들은 성숙한 이들이라고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.
아, 나도 성숙한 이로 자라나야 할 텐데. 늙은이가 되면 낭팬데 이거…






